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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에 대한 의례적 분석> -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1. The Spotless Mind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 알렉산더 포프의 「Eloisa to Abelard」 부분
주체 혹은 바로 ‘나’라고 하는 존재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억이다. 각각의 사람들이 저마다 개성을 지니는 것 역시 서로 다른 기억에 연유하는 것일 게다. 하지만 기억이라는 것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매우 불완전하고 연약하다. 수량적인 비교가 가능하다면, 인간은 평생에 걸쳐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망각할 것이다. 즉, 인간의 기억은 전체적이지 못하고 선택적이다.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은 기억에 의해 형성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선별된 기억들은 기억의 유의성을 전제한다. 대체로 무의미한 기억들이 망각되는 것이다. 인간은 유의미한 기억의 집합체이다.
기억이 선택된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전적으로 인간의 의지를 따르지는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잊고 싶은 기억마저도 기억하면서 살아가야만 한다. 인간의 삶에 흠이 없을 수 없는 바, 포프가 말한 흠 없는 마음(기억)은 인간의 바람일 뿐이다. 그러므로 흠 없는 마음이란 성취된 기도이자 체념된 소망이기도 하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이러한 인간의 소망을 담은 영화이다. 주인공들은 흠집투성이인 서로의 기억을 망각을 통해 정화하고자 한다. 즉, 흠을 없앤다는 것은 그들의 소망이다. 하지만 그것은 망각을 통한 것이기 때문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그들이 서로의 관계에서 꿈꿔왔던 것을 체념하는 것이기도 하다.
2. 의례에 대한 간단한 고찰
의례는 종교적인 믿음, 즉 신앙을 체현하는 것이다. 예배나 기도, 혹은 정교가 서로 밀접한 문화권에서는 일상생활 대부분의 행위가 의례적이다. 하지만 종교와 관련된 모든 행동을 의례라고 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주말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의례이다. 하지만 교회에서 아이들을 위한 교육의 일환으로 성경공부를 하는 것을 의례라고 하는가? 아주 큰 범주에서는 의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공부를 의례라고 단정하고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
영화의 주된 열쇠말인 ‘망각’은 단순히 한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 기억의 선택은 인간의 의지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인간의 노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는 특별한 조치가 필요한데, 그 조치 중 하나가 의례이다. 예를 들어 극심한 가뭄이 들었을 경우 인간이 그 어떤 노력을 한다 한들 비를 내리게 할 수는 없다. 이때 인간은 기우제라는 의례를 시행한다. 생일을 기념하는 것 역시 의례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태어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의 생일은 결코 자기가 태어난 날이 아니다. 달력의 월일 상으로는 같은 날이지만 엄밀히 말해서 시간은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결코 자기가 태어난 날로 돌아갈 수 없고 그 시간을 불러올 수도 없다. 생일을 기념한다는 것은 자기가 갈 수 없고 또 불러올 수 없는 시간을 다시 체험하는 의례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통과의례의 경우를 살펴보면, 인간이 한 존재에서 바른 범주의 존재로 전이되는 기준은 비실재적이다. 인간은 언제 성인이 되는가?2차 성징이 나타날 때인가 아니면 키가 어느 정도 이상이 되었을 때인가?인간은 스스로 성인이 될 수 없다. 성인식이라는 의례는 스스로 성인이 될 수 없는 인간을 성인으로 만들어준다. 이 사례들을 크게 범주화하면 ⓵신년의례, ⓶통과의례, ⓷희생제의로 구분할 수 있다. 생일기념은 신년의례의 범주에 들어간다. 신년의례는 시간이 다시 시작되는 것을 기념하지만 시간은 다시 시작되는 법이 없다. 성인식은 통과의례에 속하고 기우제는 희생제의에 속한다. 기우제의 경우 항상은 아니지만 기우제에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으로 종종 소나 돼지 따위의 동물을 잡아 신에게 바치곤 한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는 주인공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 의례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게 되는데 이 경우에는 ⓵신년의례, ⓶통과의례로 설명될 수 있다.
3. 영화와 의례
3.1. 내용적 측면에서 본 영화 「이터널 선샤인」과 의례의 관계
종교에서의 의례는 영화와 직관적으로 닮아있다. 특정한 시공간을 선별해 씬을 구성하고 의례 참여자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선사한다는 것은 영화와 의례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즉, 영화와 의례는 일종의 프레임으로서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시선은 서로를 향해있다. 그들의 세계는 상대방을 중심으로 해석된다. 이는 모든 멜로영화의 공통점일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특징적인 프레임은 라쿠나 회사에서 그들의 기억을 지우기 위한 처방이다. 조엘이 약에 취해 누워있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서는 클레멘타인이 사라져가는 다른 세계가 등장한다. 처방이 끝나고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가 부재하는 세계에서 살아가지만 모든 것은 결국 원점으로 돌아간다. 이 부분에서는 종교의 의례와 비슷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의례가 신화를 설명하는 것인지, 아니면 의례를 통해 신화가 창조되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 라쿠나 사의 처방이 이들의 관계를 다시 원점으로 되돌린다는 것, 그리고 원점에서 시작해서 다시 기존의 틀로 돌아온다는 것은 재현과 거듭남 혹은 기념이라는 의례의 특성과 잘 맞는다.
「이터널 선샤인」의 씬 분석에 앞서, 플롯은 <그림 1.>과 같다. 영화의 첫 장면은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서로 라쿠나社의 망각 처방을 받은 뒤 다시 처음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주인공들은 물론이고 관객들도 아직 이러한 사실을 모른다. 영화의 두 번째 시퀀스는 라쿠나사의 처방과정과-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 -ml:namespace prefix = w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word" />함께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처방 직전의 기억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세 번째 시퀀스에서는 시간상으로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오게 되며 서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게 된다.
씬 분석(1).
씬 1. 클레멘타인이 음주운전을 하자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 다투게 된다.
모든 연인들은 서로의 완벽한 관계를 꿈꾼다. 설령 철저히 현실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연인일지라도, 흠 없는 관계에 대한 소망은 있는 법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러한 기대를 가지고 관계를 맺게 된다. 이것은 일종의 상호작용이다. 즉, 에너지의 흐름인 셈이다. 서로 다른 존재는 다른 에너지(그것이 질적인 측면이든 양적인 측면이든)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에너지는 언제나 평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흐른다. 인간관계 역시 에너지의 교류로 설명될 수 있다면, 관계 초기에는 서로 다른 에너지가 상대방에게 혹은 상대방으로부터 유입되면서 관계의 유인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에너지가 평형상태에 다다르면 그런 에너지로부터의 유인은 사라진다. 이것을 우리는 권태기라고 한다.
<씬 1.> 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다툼의 원인은 한 쪽의 일방적인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어쩔 수 없이 이뤄지는 에너지 흐름의 중단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시간을 돌리는 것. 하지만 인간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씬 분석(2).

씬 2. Lacuna Inc. 씬 3. 의례는 신화를 재현한다.
낙질 혹은 열공을 의미하는 단어 Lacuna는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기억을 망각하도록 도와주는 회사의 이름이다. 즉, 라쿠나는 의미의 공백을 뜻한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선택한 방법은 바로 자신들의 기억에 공백을 만드는 것이다. 시간에 있어서 공백이란 개념은 있을 수 없다. 공백만큼 시간은 당겨지게 마련이다. 즉,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선택은 그들의 시간을 되돌리는 것과 동치이다.
라쿠나의 처방은 의례적인 특징을 지닌다. 우선 그들의 처방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소망이 되기도 하는 일들을 라쿠나가 대신 처리해 준다. 라쿠나의 처방은 사람들의 기억을 지움으로써,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추악한 자신의 과오에 의해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서로에게 권태롭거나 실망한 연인들에게, 모욕적인 기억을 지닌 사람들에게 흠 없는 마음을 선사해 주는 것이다. 라쿠나의 처방 과정을 보면 단순히 컴퓨터 파일을 지우듯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의식에 침투해 고객의 기억을 다시 무의식 속에서 재현함으로써 지우는 것이다. 의례 역시 마찬가지인데, 신화가 의례의 구술적 상관물이라는 것은 의례가 신화를 재현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씬 3.>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영화의 두 번째 시퀀스에서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기억들이 조엘의 머릿속에서 재현된다.
씬 분석(3).
씬 4. 서로를 잊기 위해 기억을 지우지만 결국 이전과 똑같은 선택을 하게 되는 조엘과 클레멘타인.
기억 지우기라는 의례적 행위를 통해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관계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마치 신년의례처럼 모든 시간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혹은 통과의례처럼, 그들의 범주를 다른 범주(여기서는 다시 원래의 범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크다)로 옮기는 것이기도 하다. 통과의례의 측면을 좀 더 살펴보면, 통과의례는 일단 분리와 전이, 통합의 단계로 나뉜다. 라쿠나의 처방 역시 마찬가지인데, 우선 조엘은 라쿠나의 처방대로 무의식에 빠짐으로서 일상과 분리된다. 그리고 그 무의식 속에서 자신의 기억을 마주한다. 이때, 조엘은 기억을 관찰하는 조엘과 기억 속에 머무는 조엘로 동시에 존재한다. 때때로 조엘은 기억 속의 조엘을 바라보기도 하지만 스스로 기억 속의 조엘이 되기도 하면서 전이적인 양상을 보인다.
씬 5. 조엘은 기억 속의 자신을 바라보는가 하면 직접 기억 속의 자신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이렇게 분리와 전이의 단계를 거침으로써 라쿠나의 처방이 작동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망각하면서 새로운 통합의 단계로 나아간다. 다만 이 영화에서 통합은 보통의 통과의례가 진보적인 범주로 나아가는 특징이 있는 것과 달리, 다시 원점으로 돌아옴을 의미한다. 즉, 통과의례의 측면과 신년의례의 측면이 공존한다.
씬 분석(4).
씬 6. 영화의 초반 씬(좌)와 마지막 씬(우). 시간이 지워진 후에도, 모든 사실을 알기 전에도, 알고 난 후에도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다시 사랑을 선택한다.
이 영화에서 특이한 점은, 의례가 끝나고 난 뒤에 그 의례를 해안 의도와 달리 모든 일들이 다시 반복된다는 점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의례를 행한 이유는 서로의 기억을 지우고 상대방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 의례가 성공적으로 행해지고 모든 기억이 지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사랑하게 된다.
이러한 결과가 의미하는 것은 의례의 허구성일 것이다. 의례의 종교적·기능적 의의를 무시하는 의미에서 허구적이라는 것은 아니고, 주체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그 본질을 바꾸려 하는 시도의 무력함이라는 측면에서 허구적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의 기억을 지워버렸다. 그런데 이러한 통과의례 혹은 신년의례는 그들의 본질 그 무엇도 바꾸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들의 기억 지우기는 서로를 회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애초에 서로의 관계를 다시 (청산이 아닌)시작하려는 의도에 가까웠을 수 있다. 의례가 바꾼 것이 오로지 시간뿐이라면, 모든 사건은 다시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씬 7.>에서 하워드와 메리의 관계를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하워드와 메리에겐 불륜이라는 과거가 있었고, 메리의 기억은 지워졌지만 메리 스스로의 선택으로 모든 사건은 반복된다.
씬 7. 하워드와 메리의 관계 역시 반복된다.
3.2. 구조적 측면에서 본 영화 「이터널 선샤인」과 의례의 관계
구조적인 측면에서 영화의 의례적 특징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영화와 관객의 관계 역시 고려해야만 한다. 위의 내용적 측면에서는 영화와 주인공, 주인공의 사건만을 고려했지만 구조적인 특징 분석에서는 영화와 관객의 관계 역시 고려하기로 한다.
의례에서 기념되는 시간은 현재가 아니고, 재현되는 사건 역시 현재의 사건이 아니다. 의례의 모든 공간과 시간은 이전의 사건 혹은 미래에 있을 사건에 대한 기념이자 재현이다. 의례가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분리와 전이 그리고 통합의 과정을 거치듯이, 영화도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스크린 위에 펼치고 관객에게 이와 같은 과정을 제시한다. 영화를 관람할 때 분리와 전이는 주위 환경의 특성을 반영하면서 매우 빠르게 진행된다. 그리고 전이의 과정은 영화 상영시간 내내내 지속되면서 소위 몰입감을 관객에게 제공한다. 영화와 관객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영화는 관객이라는 주체를 영화 속 주인공과 합치시키려 한다. 즉, 이것이 소위 몰입이라는 개념이다. 관객이 영화 속의 인물과 동일시 될수록 몰입도가 커진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관객이라는 주체는 영화 속 주인공에게 전이된다. 그리고 이런 분리와 전이를 통해 영화를 관람한 관객에게 어떤 변화가 생기게 마련인데 이를 통합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영화가 이러한 의례적 과정을 잘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몇몇 장치들이 필요한데 바로 몽타주, 미쟝센, 셔레이드라 불리는 영화 기법들이다. 구술되는 것(legomena)은 신화이고 행해지는 것(dromena)은 의례이다. 따라서 영화 역시 의례적 성격에 집중한다면 행해지는 것, 보여지는 것, 이미지의 집합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는 많은 것들을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 <씬 8.>을 보면 조엘이 클레멘타인에게 전화를 거는 셔레이드가 나오는데 굳이 조엘이 클레멘타인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나레이션으로 ‘설명’하지 않고 행위를 통해 직접 ‘보여준다.’따라서 셔레이드는 의례 참가자들의 몸짓 자체로 해석될 수 있다.
씬 8. 셔레이드: 클레멘타인에게 전화를 거는 조엘.
반면 미쟝센은 화면의 배치나 구도, 전반적인 구성을 통해 이미지를 전달한다. <씬 9.>를 보면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대화를 나누는 도중 화면이 페이드 아웃 되면서 클레멘타인이 암흑 속으로 사라지는데 이는 조엘의 기억 속에서 점점 클레멘타인이 사라져감을, 현재 화면에 나타난 시공간이 현실이 아니라 조엘의 머릿속 무의식임을 나타낸다. 미쟝센은 의례적 공간을 나타낸다. 의례적 공간에는 그곳이 신성한 공간임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들이나 각종 소품들(십자가나 성화, 휘장 등)이 존재한다.
씬 9. 미쟝센: Fade out
몽타주는 씬과 씬의 관계를 통해 이미지를 담아내는 작업이다. 영화에서는 몽타주를 사용하기 쉽지만 바로 눈앞에서 행해지는 의례의 경우 모든 화면이 연속적이기 때문에 씬을 나누기 어렵고 따라서 몽타주와 같은 특징이 나타나기 어렵다. 하지만 예를 들어, 성만찬식에서 신부가 신도들을 부르고 이에 신도들이 앞으로 나가 밀전병과 포도주를 받아먹는 장면은 신의 대리인으로서 내리는 명령과 그 따르는 순종이라는 의미를 담아내는 몽타주라고 볼 수 있다. <씬 10.>에서는 하워드 박사팀의 무미건조한 치료행위와 무의식에서 벌어지는 조엘의 처절한 몸부림을 연속적인 샷으로 보여주는데, 이런 몽타주는 영화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그리고 이 몽타주는 라쿠나의 치료행위의 부적절함과 조엘이 지닌 기억의 소중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씬 10. 몽타주: 현실에서의 무미건조한 치료행위와 무의식에서 보여지는 조엘의 처절한 몸부림.
4. 정리 및 결론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우선 그 내용적 측면에서 의례적이다. 라쿠나의 치료행위가 의례적 특징을 지니기 때문이다. 기억 지우기를 통한 재현과 기념, 거듭남이라는 특징은 의례적인 동시에 라쿠나의 치료방법과 동일하다.
구조적으로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의례와 닮아있는데 사실 이는 모든 영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영화는 셔레이드와 미쟝센, 몽타주 등의 기법을 통해 설명보다는 보여줌으로써 내용을 전달한다. 의례 역시 신화와 달리 행해지는 것(dromena)으로서, 보여주기를 통해 그들의 행위를 설명한다.
이 영화의 특징은, 모든 의례적 행위가 끝난 뒤에 바뀐 것은 오로지 시간뿐이고 모든 사건은 다시 반복된다는 것이다. 사실 조엘이나 클레멘타인, 메리는 모든 사건을 무효화 시키고 그 사건들을 회피하기 위해 의례적 행위를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와 달리, 기억은 사라졌음에도 사건은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다시 시작된다. 그렇다면 그들의 마음에는 다시 흠집이 생기기 시작한 것일까?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관계에서 흠집이랄 것은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 낀 낡은 먼지들이었다. 사랑 자체를 후회하고 흠으로 여긴 것이 아니었을 것이란 뜻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그들의 사랑을 청산하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저 먼지를 털어내는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다만, 인간이란 유의미한 기억의 집합체이며 그 기억을 의도적으로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먼지를 털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들은 먼지 쌓인 사랑을 견딜 수 없어 아예 청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라쿠나는 물론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예상과도 달리, 그들이 다시 사랑을 함으로써 먼지 털기가 가능해졌다고 볼 수 있지는 않을까? 곧 다시 먼지가 쌓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먹어도 먹어도 곧 배가 고파진다고 밥을 굶진 않듯이, 사랑에 또다시 곧 먼지가 쌓일 것이라고 그저 흠집투성이가 되어가는 사랑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 처절한 노력에 의해, 결국 흠이란 것은 사랑 그 자체가 아닌, 사랑에 쌓인 먼지였다는 것을 깨닫고 먼지를 털어내는 노력에 의해 종종 사랑에는 찬란하고 영원한 햇살이 비치지는 않을지.
참고자료
단행본
토드맥고완 외, 『라캉과 영화이론』, 김상호 옮김, 인간사랑, 2008.
한국종교연구회, 『종교다시읽기』, 청년사, 1999.
웹페이지
http://customsearch.naver.com/dbplus.naver?pkgid=201007140&query=%EA%B8%B0%EC%9A%B0%EC%A0%9C&id=0000000499c8
* 본문 중 밑줄 친 부분은 ‘종교와 영화’ 수업이나 다른 수업 시간에 배운 것들입니다. 따로 출처를 밝히기가 애매해 이렇게 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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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루스는 글을 편집하기가 까다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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